2025-07-07 10:39:48
의정 갈등이 수습 단계에 들어서면서 과학적 근거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의협 의정연은 간담회를 개최해 향후 비전을 제시했다.
최근 의정 갈등이 표면적으로 봉합 국면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공공의대 신설 및 의대 정원 확대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에 의사단체는 단순히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을 넘어, 정책 대안과 방어 논리, 그리고 과학적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하는 중대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의료계의 핵심 정책 싱크탱크인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이하 의정연)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의정연은 지난 2일 창립 23주년을 기념하며 기자간담회를 개최, 현재의 위기를 '전환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의정연 안덕선 원장은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이제는 수비적 대응을 넘어 공격적 연구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연구원은 이미 성과 창출 단계에 진입했으며, 선제적인 연구와 정책 제안이 가능한 독립적 정책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하며, 의정연의 위상 재정립 의지를 피력하였다.
의정연은 지난 1년간 수행한 연구 중 가장 상징적인 성과로 '의사 인력 수급 추계 연구'를 꼽았다.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확대를 강행하는 상황에서, 의정연은 현실적인 근무일 수, 의료 수요, 인구 구조 변화 등을 반영한 자체 모델을 제시하였다. 이 연구는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릴 경우 10년 안에 과잉 공급이 발생할 수 있다는 명확한 경고를 담고 있었다. 이 연구 결과는 내부 보고서에 그치지 않고 국제학술지 'BMC Public Health'에 게재되어 대외적 신뢰성을 확보하였으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청문회에서도 주요 인용 자료로 활용되었다. 안 원장은 "정부가 더 이상 의사협회에 '근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지 않게 된 데는 이 논문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KHP(Korea Health Panel) 기반의 실제 근무 자료를 사용하여 추계의 합리성을 높였으며, 정치가 아닌 데이터로 말하는 방식이 결국 정책 전환의 단초가 될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현 의료 사태로 인한 의학교육의 질 저하 우려 또한 증대되고 있다. 의정연은 의대 증원이 교육 현장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한 결과, 교수 1인당 학생 수 증가, 실습 인프라 미비, 임상 교육 기회 축소 등의 문제가 현실화하고 있다고 진단하였다. 안 원장은 한국 의학교육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전공의 수련의 현대화'를 지목하였다. 의사 양성은 입학부터 은퇴까지 하나의 파이프라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며, 이 과정의 중심에 전공의 수련이 있다는 판단이다. 전공의 수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기본 의학교육이나 평생교육의 질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였다. 이에 의정연은 전공의 수련의 질 향상 방안을 포함한 의학교육 전주기 개편 로드맵을 수립 중이며, 의료교육학회 및 수련병원 교육 책임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현실에 기반한 개선 방안을 제시할 계획이다. 안 원장은 "교수가 임상 현장에서 학생과 전공의를 직접 교육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재정비하지 않는 한, 수련의 질은 향상되기 어렵다. 교육을 행정적 효율이나 비용 관점에서만 접근하면 결국 환자 안전과 임상 역량 모두가 위협받게 된다"고 비판하며, 교육의 본질적 가치 회복을 촉구하였다.
의정연은 다음 단계로 의사단체의 사회적 책임을 제도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전문직의 책무는 단순한 직무 윤리를 넘어 자율성과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인식 하에, 안 원장은 '의사면허관리기구'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7~8년 전부터 면허관리원 설립을 제안해 왔으나, 의료계 내부 공감대는 형성되었음에도 제도화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면허관리원 설립을 위해서는 단순한 연구를 넘어 의료법 및 의협 정관 개정, 대의원회 및 중앙윤리위원회, 시도의사회의 협조 등 복합적인 구조 정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현 집행부에서 제도 완성까지는 어렵더라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역할과 구조부터 확립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였다. 안 원장은 "지속 가능한 자율 규제 체계로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전문직의 프로페셔널리즘은 단순한 개인 윤리가 아니라, 단체 차원의 자율 기구와 책임 체계를 수립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하며, "이를 위해 영미권 면허 기구의 사례를 벤치마킹하고 있으며, 의료윤리와 평가 제도, 징계 권한에 대한 연구도 병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국회, 법조계, 보건복지부 등 관계 기관이 전문직 자율성의 가치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법적 근거 마련뿐만 아니라 의료계 내부의 총체적 정비가 시급하다고 촉구하였다.
의정연은 자신들의 역할이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타당성과 근거를 제공하는 데 있음을 명확히 하였다. 정책 실행의 책임은 협회 집행부와 대의원회 등 정치적 판단의 영역임을 인정하면서도, 의료계 내부에서 정책 우선순위와 방향이 정해지면 연구원은 최적의 데이터를 제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의정연은 정책의 과학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집중할 것이며, 단순한 현안 대응을 넘어 중장기 의료제도 개편을 위한 연구 틀을 구축하고 정부, 국회, 외부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확대하겠다는 전략을 제시하였다. 핵심 의제로는 면허관리원 설립, 상대가치수가 대안 모형 제시, 의학교육 전주기 개편, 건강보험제도 구조 재설계 등을 제시하였다. 또한, 그간 생산된 연구 보고서 및 정책 자료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보관·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실을 구축하였고, 연구 고도화를 위한 의협 의학정보원과의 연계도 추진 중이다. 안 원장은 "우리의 역할은 총구를 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총을 쏠 수 있도록 방아쇠를 만들어야 한다"고 비유하며, "의정연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들이 언제든 연구 주제를 제안하고 자료를 요청할 수 있도록 '회원 참여'를 독려한다. 의료 현장에 필요한 연구를 제안하면 최선을 다해 수행하겠다"고 강조하며, 의료계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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