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병원과 고려대 연구진이 최신 유전체 분석 기법을 활용해 10년 넘게 미진단 상태였던 청소년 환자의 희귀 신경퇴행성 질환을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국가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시범사업의 성과로, 희귀질환 진단과 치료 계획 수립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구진은 23일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서울대병원 내원 환자들과 한국바이오뱅크 코호트에 등재된 대규모 유전체 정보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채종희, 문장섭, 이승복 서울대병원 임상유전체의학과 교수와 최정민 고려대 의과학과 교수팀이 주도했다.
주목할 만한 사례는 19세 남성 환자 A의 경우다. A는 9살 때부터 운동기능 퇴행, 보행장애, 실조증 등의 신경학적 증상을 보였으나,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했다. 자기공명영상(MRI)에서 백질뇌병증과 소뇌 위축 소견이 나타났지만, 유전자 진단의 한계로 병명을 특정할 수 없었다.
연구진은 최신 차세대염기서열분석(NGS) 기법을 도입해 NOTCH2NLC 유전자의 단연쇄반복 변이를 발견했다. 이를 통해 A는 '신경세포핵내봉입체병'으로 진단받았다. 이는 세계적으로 가장 어린 나이에 발병한 사례로 기록됐다.
신경세포핵내봉입체병은 신경세포 핵 안에 비정상적인 단백질이 축적되는 신경퇴행성 질환이다. 주로 성인기에 발병하며, 백질뇌병증, 진행성 인지기능 장애, 실조증 등의 증상을 동반한다. NOTCH2NLC 유전자에서 GGC 염기서열이 비정상적으로 반복되는 '단연쇄반복 변이'가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단연쇄반복 변이를 식별하기 위해 롱리드(long read) 방식의 최신 시퀀싱 기법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서울대병원에 내원한 원인불명 백질뇌병증 환자 90명 중 16명(17.8%)에서 단연쇄반복 변이를 확인했다. 이는 국내 원인불명 백질뇌병증 환자 10명 중 1~2명이 신경세포핵내봉입체병을 앓고 있음을 시사한다.
더불어 연구진은 한국바이오뱅크 코호트에 등재된 3887명의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의 유전체 정보를 분석했다. 그 결과 NOTCH2NLC 유전자의 GGC 염기서열이 65회 이상 반복될 때 신경세포핵내봉입체병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기준을 확립했다. 이를 적용해 미진단 신경퇴행 환자 6명을 새롭게 신경세포핵내봉입체병으로 추정했다.
채종희 서울대병원 임상유전체의학과 교수는 "이번 연구는 희귀질환 진단에 있어 대규모 데이터 기반 유전체 분석의 중요성을 보여준다"며 "국가 바이오 빅데이터를 토대로 희귀질환의 새로운 진단법과 치료제 개발 연구로 확장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신경유전학'(Neurology Genetics) 최신호에 게재됐다. 보건복지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하는 '국가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수행됐다.